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로 로마노 (문단 편집) == 역사 == 원래 포로 로마노가 세워진 자리는 습한 저지대로, 물이 고여있어 사람들이 살기 힘든 지역이었다. 다만 기원전 7세기 경 대규모의 간척 사업이 진행되면서 물이 빠져나갔고, 이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점차 로마 도심의 한복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포로 로마노는 당시 로마를 양분하던 [[로물루스]]와 티투스 타티우스의 세력이 만나는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두 세력이 서로 교류하기 위하여 포로 로마노에서 만나면서 더더욱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포로 로마노는 점차 거대한 시장판으로 변모해갔고, 인구 유동성이 로마에서 가장 높은 지역으로 떠올랐다. 정치인들은 당연스레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포로 로마노에서 연설, 선거운동, 재판 등을 열었고, 이에 따라 점차 포로 로마노는 정치적 중심지가 되기 시작한다. [[로마 왕정]] 시기에 로마의 왕들은 포룸에 행정 건물들을 다수 지었으며,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는 이 곳에 [[베스타]]를 모시는 신전을 지어 베스타를 모시는 여사제들을 거주하도록 하였다. 왕정이 몰락한 이후인 [[로마 공화정]] 시기에도 포로 로마노는 여전히 정치의 중심지로 남았다. 사투르누스 신전과 [[카스토르|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콩코르디아 신전 등이 이때 세워졌고, [[술라]]는 포룸 한복판을 대리석 판석으로 포장하였다. 기원전 78년에는 공공 기록관이 들어섰고, 기원전 44년에는 암살당한 카이사르의 시신을 이 곳에서 장례를 치렀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우구스투스]]는 포로 로마노에 대대적인 개축 공사를 실시하면서 제국의 중심에 맞게 변모시켰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개선문과 율리우스 신전 등을 지었으며, 베스타 신전 등을 보수하기도 했다. 이후 [[로마 제국]] 시기에 역대 황제들의 대관식이 바로 이 곳에서 열렸으며, 중요한 정치 행사나 개선식에 포로 로마노가 사용되었다. 다만 [[군인 황제 시대]]에는 늙은 황제 [[갈바]]가 이 곳에서 암살당했으며, [[오토]] 황제도 이 곳에서 친위대에게 목숨을 잃기도 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포룸 뒤쪽에 거대한 트라야누스 포룸을 지었고, 이후 행정 업무는 대부분 트라야누스 포룸으로 이전되었다. 203년에는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이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새로 들어섰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에도 새 바실리카나 포룸들이 연이어 지어지면서 로마 제국 전역에서 가장 호화롭고 번성한 곳이라는 영예를 몇 백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누릴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에는 포로 로마노에 마지막 리모델링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나름 건재했던 로마의 위상을 과시하기도 했다. [[파일:romanforum22.jpg|width=100%]] 다만 이토록 화려했던 포로 로마노도 로마 제국의 쇠퇴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다. 로마 제국이 사실상 핵심 지역을 모두 차지한 [[동로마 제국]]과 껍데기만 남아버린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어지고, 옛 수도인 로마가 서로마 제국에 소속되면서 포로 로마노도 같이 쇠락했던 것이다. [[사코 디 로마]]가 여러 차례 이루어지면서 야만족들이 포로 로마노과 인근의 [[팔라티노 황궁]]에 있는 보물들을 약탈하고 건물들을 파괴하였으며, 재정이 모자랐던 서로마 제국은 이를 보수할 여력도 없었다. 결국 제국은 포로 로마노가 황폐화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476년에는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면서 포로 로마노도 그 중요성이 크게 떨어졌다. 기원후 500년에는 한때 100만 명에 달하던 로마 인구가 25만 명까지 급강하했고, 시민들은 포로 로마노를 어느 정도 보전하려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6세기 경에는 점차 포룸의 건물들이 [[가톨릭]] 성당으로 변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도움은커녕 로마를 방문하면서 신전의 납 지붕과 대리석을 왕창 뜯어가면서 포로 로마노의 황폐화에 거들었다. 608년에 황제 [[포카스]]를 기리는 기둥이 세워지는데, 이것이 포로 로마노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되었다. 8세기 경 로마에 방문한 여행자의 말에 의하면, 당시 포로 로마노는 예배당과 교회에 둘러싸인 돌더미 수준이었으며 주위를 지나는 사람들마다 이를 보며 제국의 멸망을 한탄했다고 할 정도니 당시 얼마나 포로 로마노가 초라한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아비뇽 유수]]에서 돌아오면서 로마에 대대적인 성당 건설을 명했고, 이 시기에 가장 가까운 석재 공급지였던 포로 로마노와 [[팔라티노 황궁]]에서 또 대거 석재가 유출되면서 기껏 남아있던 건물들도 많은 수가 헐려나가거나 무너져 내렸다. [[파일:romanforum11.jpg|width=100%]] 중세 시대 포로 로마노의 모습. 지오반니 파올로 파니니 작 이같은 채석 작업도 어느 정도 문화재 보존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17세기부터는 자제되었으며, 포로 로마노는 주로 예술가나 철학가들이 방문하여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장소가 되었다. 1803년에는 고고학계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을 발굴하고 주위를 정리하는 등 본격적인 보존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1898년에는 [[이탈리아 왕국]] 정부 차원에서 보존 및 복원 프로젝트가 가동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복구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이탈리아 정부에서는 추가적인 훼손을 우려했고, 서두른 복원은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신념 하에 신전이나 바실리카를 완전히 개건하는 것은 극히 꺼리며, 기존에 남아있는 건물들을 정리하고, 유구를 발굴하는 것에만 그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